사목교서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원주 교구의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절대적 희망이십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희망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지난 한 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직도 그 어려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 희망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작은 희망들을 바라보며 또 한 해를 시작합니다.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신부님이야말로 강도 만난 사람처럼 신앙과 영성에 헐떡이는 조선의 백성을 위한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기념하고, 이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특히 사순절 기간 동안 세 가지 훈련을 합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리고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훈련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이 훈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의 해’였던 작년에 이어 올해는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자선의 해’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가족의 한 사람으로, 교회의 한 사람으로, 사회의 한 사람으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밝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갈등이 불가피하겠지만, 대화하며 해결을 시도할 때,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그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마태 22,37)는 첫째 계명에 이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둘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싶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 들을 사랑하는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일지라도 초지일관하여 끝까지, 그리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 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율법교사는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되묻습니다.“누가 내 이웃입니까?”그래서 예수님은‘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루카 10, 30-35) 예수님은 대화를 통하여 율법학자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이웃이었다는 답을 율법학자 자신으로부터 얻어냈습니다. 초주검이 되어버린 사람을 버려두지 않고 가엾은 마음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비까지 부담해준 고마운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 강도를 만난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상으로 고마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배고플 때마다 음식을 제공해주고,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가 주고,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도 학교에 보내며 등록금을 부담해준 ‘내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만큼은 아니어도 오늘의 내가 될 수 있기 위해 도움을 준 많은 이웃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었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그 강도를 만난 사람 역시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이웃인데, 그는 나의 이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웃들이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선은 강도를 만난 사람과 이웃이 되게 하였습니다. 미움은 우리의 이웃과 원수가 되게 하지만, 자선은 우리 서로는 물론 원수마저 이웃이 되게 합니다. 사실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다인들은 서로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정한 종’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마태 18,23-35 참조)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자가 그 빚을 모두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500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는 모든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임금은 말합니다.“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아주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 대단히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입은 자비를 깨닫게 되면, 우리도 우리 이웃에게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둘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행복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의 행위요, 자비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황금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은 잘 난체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하시고, 우리가 좋아하는 겸손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외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40 )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에서 벗어 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남기신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수룩한 사람을 얕잡아보고‘저 사람은 내 밥이냐!’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고 비워 우리 모두에게‘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오늘도‘나는 결코 너의 밥이 될 수 없다.’며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그 뿐 아니라 타인은 ‘내 밥’으로 삼기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타인에게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눠서 지려는 마음도 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눌 것이 없다면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이기주의와 약육강식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김수환 추기경님의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에서)
 

우리는“나눌 것이 없다면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밥이 될 수 있다.”는 말씀과 우리들에게는 나눌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선할 수 있는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보다 귀한 마음, 옷보다 귀한 미소, 집보다 귀한 사랑, 빵보다 귀한 친절, 권력보다 귀한 정직, 어떤 물건보다 귀한 칭찬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많은 비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옥은 팔보다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자기 입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천국은 그 긴 젓가락으로 상대방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자선을 베풀 때 이 땅은 천국이 됩니다. 자기 밖에 모를 때 이 땅은 지옥이 됩니다. 이 땅에 천국을 세울 것인지, 아니면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 것인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지혜 문학에 속하는 토빗기는 아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토빗기 전체를 요약합니다.“애야, 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하고, 어떠한 행동이든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하여라.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술은 취하도록 마시지 말고, 취한 채 너의 길을 걷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너에게 남는 것은 다 자선으로 베풀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토빗 4, 14-16)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우리 원주교구에 , 우리 본당 공동체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귀담을 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됩시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기도합니다.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원주 교구의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절대적 희망이십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희망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지난 한 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직도 그 어려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 희망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작은 희망들을 바라보며 또 한 해를 시작합니다.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신부님이야말로 강도 만난 사람처럼 신앙과 영성에 헐떡이는 조선의 백성을 위한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기념하고, 이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특히 사순절 기간 동안 세 가지 훈련을 합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리고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훈련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이 훈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의 해’였던 작년에 이어 올해는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자선의 해’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가족의 한 사람으로, 교회의 한 사람으로, 사회의 한 사람으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밝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갈등이 불가피하겠지만, 대화하며 해결을 시도할 때,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그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마태 22,37)는 첫째 계명에 이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둘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고 싶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 들을 사랑하는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일지라도 초지일관하여 끝까지, 그리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 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율법교사는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되묻습니다.“누가 내 이웃입니까?”그래서 예수님은‘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루카 10, 30-35) 예수님은 대화를 통하여 율법학자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이웃이었다는 답을 율법학자 자신으로부터 얻어냈습니다. 초주검이 되어버린 사람을 버려두지 않고 가엾은 마음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비까지 부담해준 고마운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 강도를 만난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상으로 고마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배고플 때마다 음식을 제공해주고,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가 주고,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도 학교에 보내며 등록금을 부담해준 ‘내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만큼은 아니어도 오늘의 내가 될 수 있기 위해 도움을 준 많은 이웃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었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그 강도를 만난 사람 역시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이웃인데, 그는 나의 이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웃들이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선은 강도를 만난 사람과 이웃이 되게 하였습니다. 미움은 우리의 이웃과 원수가 되게 하지만, 자선은 우리 서로는 물론 원수마저 이웃이 되게 합니다. 사실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다인들은 서로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정한 종’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마태 18,23-35 참조)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자가 그 빚을 모두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500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는 모든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임금은 말합니다.“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아주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 대단히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입은 자비를 깨닫게 되면, 우리도 우리 이웃에게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둘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행복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의 행위요, 자비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황금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은 잘 난체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하시고, 우리가 좋아하는 겸손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외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40 )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와 약육강식에서 벗어 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남기신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수룩한 사람을 얕잡아보고‘저 사람은 내 밥이냐!’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고 비워 우리 모두에게‘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오늘도‘나는 결코 너의 밥이 될 수 없다.’며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그 뿐 아니라 타인은 ‘내 밥’으로 삼기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타인에게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눠서 지려는 마음도 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눌 것이 없다면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이기주의와 약육강식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김수환 추기경님의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에서)
 

우리는“나눌 것이 없다면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밥이 될 수 있다.”는 말씀과 우리들에게는 나눌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선할 수 있는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보다 귀한 마음, 옷보다 귀한 미소, 집보다 귀한 사랑, 빵보다 귀한 친절, 권력보다 귀한 정직, 어떤 물건보다 귀한 칭찬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많은 비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옥은 팔보다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자기 입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천국은 그 긴 젓가락으로 상대방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자선을 베풀 때 이 땅은 천국이 됩니다. 자기 밖에 모를 때 이 땅은 지옥이 됩니다. 이 땅에 천국을 세울 것인지, 아니면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 것인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지혜 문학에 속하는 토빗기는 아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토빗기 전체를 요약합니다.“애야, 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하고, 어떠한 행동이든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하여라.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술은 취하도록 마시지 말고, 취한 채 너의 길을 걷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너에게 남는 것은 다 자선으로 베풀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토빗 4, 14-16)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우리 원주교구에 , 우리 본당 공동체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귀담을 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됩시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기도합니다.

2020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 이사장 : 곽호인 신부 | 상임이사 : 배하정 신부
법인등록번호 : 141232-0000411
강원도 원주시 개륜1길 63(봉산동 753-1) / Tel. 033-731-4557 / Fax. 033-731-4559 / E-mail. wjcaritas@catholic.or.kr